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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루살렘 성전

     

    구약성서는 마카베오서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이스라엘 역사와 그리스, 로마를 소개합니다.  우리는 마카베오 반란의 역사적 중요성을 탐구하고, 이 격동적인 기간 동안 고대 이스라엘의 문화적, 종교적 풍경을 탐구합니다. 헬레니즘 영향에 대한 최초의 저항부터 독립된 유대 국가 설립에 이르기까지 마카베오는 이스라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습니다.

     

    1. 불꽃을 위한 중간시대

     

    구약시대에 언제까지 하나님이 나타나셨을까? 기원전 415년 말라기까지입니다. 기원전 39년까지 약 376년간은 침묵기간이었습니다. 그리스 민족은 인도-유럽어족으로 중앙아시아의 흑해와 카스피해 근처에서 남하하였습니다. 그리스 면적은 우리나라의 1/4이며, 스위스보다 작습니다. 80%의 산과 분지로 형성되어 있어서 폴리스라는 도시국가가 발달하였습니다.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등 유대교 종파들은 그리스의 지배 하에서 생겨난 것들입니다. 작은 도시국가들로 이루어진 그리스가 찬란한 문화를 이룩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리스는 남, 북으로 갈라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척박한 환경이었고, 살아가기 위해 많은 연구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페르시아의 전제주의도 그리스의 민주주의에 패했던 것입니다. 기원전 4세기에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에서 페르시아까지 정복합니다. 수도인 펠라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3년 동안 배웠고, 전쟁터에 역사, 지리, 식물학자까지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는 고레스왕처럼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지만, 페르세폴리스 지방에서 모든 것을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인도의 서부까지 침공하였으나 바빌론에서 열병으로 죽습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도 문화의 전달자였으므로 독일인에게도 환영을 받았습니다. 구약성경은 헬라어 역본으로 70인 역이 번역되는 등 초기 기독교가 알렉산드리아에서 발달합니다. 헤브라이즘은 신본주의, 즉 유대교입니다. 헬레니즘 문화는 330년간 지속되었는데 인본주의를 기초로 합니다. 그리스인은 자신을 제우스와 헬렌 사이에서 태어난 가장 아름다운 여신의 자손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지방은 헬레니즘 전파의 기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여러 군데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기원전 250년경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아리스테를 예루살렘으로 보내어 모세율법을 헬라어로 번역하게 하였습니다. 그 후 3세기에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의 나머지가 헬라어로 번역됩니다. 번역이 중요한 이유는 딴 민족에게도 말씀을 전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마카비 반란: 헬레니즘 영향에 저항

     

    하스몬 반란이라고도 알려진 마카비 반란은 기원전 2세기에 셀레우코스 왕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의 압제적인 통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헬레니즘의 영향은 전통적인 유대 관습을 침식하려고 했고, 이는 예루살렘의 두 번째 성전을 모독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문화적 동화와 종교적 박해에 직면하여 마카베오 가문(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유다 마카베오)이 이끄는 유대인 반란군이 저항에 나섰습니다. 헬레니즘 영향에 대한 최초의 저항은 마카베오 왕조가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과 문화적 유산을 맹렬하게 옹호하면서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추적인 순간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하누카 축제로 기념되는 예루살렘의 성공적인 해방과 더럽혀진 성전의 재헌납은 외국의 압제에 대한 신앙의 승리와 회복력을 상징했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중간시기에 유대민족은 103년간 독립상태였습니다. 그 후 26년 동안 제사장 정치제로 종교적 자유는 있었지만, 로마로부터의 정치적 독립은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안티오코스5세가 유대교를 말살하려고 하나님의 성전에 제우스 신상과 돼지피를 바쳤습니다. 또 이슬람교도가 돼지피를 먹지 않고 안식일과 할례를 지켜도 죽였습니다. 아다티아스라는 모딘 지방의 제사장은 종교적, 정치적 자유를 쟁취하기도 하였습니다. 서북쪽 산으로 도망하여 게릴라 전을 하다가, 사람이 많이 모이자, 산에서 내려와 그리스에 동조한 자들을 죽였습니다. 안식일에도 방어 차원의 전쟁을 하였습니다. 하시딘 파는 경건한 유대주의 자들이었지만 대체로 마카비 정책을 따랐습니다. 마카비는 백전백승의 유능한 군인이었습니다. 그리스의 정규군이었던 시리아군을 전멸시켰습니다. 제우스 상과 신상이 파괴되고 3년간이나 모독당했던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종교적 자유는 있었으나 정치적 자유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때 외교수단이 뛰어났던 시리아의 귀족 요나단이 로마, 스파르타 등과 조약을 맺고 기원전 150년에 대제사장 자격으로 유다의 통치자가 됩니다. 그는 안티오코스 5세에 의해 암살당합니다. 하스몬가의 시몬은 데메트리우스 2세를 지지하고 제1대 왕이 됩니다. 유대의 통치자가 된 그는 세금을 면제하고, 세습적인 대제사장으로서 자치적인 독립을 합니다. 이때까지가 영웅적 투쟁시대입니다. 이후 국내외적으로 유다의 국토는 넓어졌지만 국가붕괴의 조짐이 보입니다. 시몬의 사위 톨레미가 시몬과 그의 두 아들을 죽이고 제2대 왕 요한 히르카누스가 됩니다. 이 시기가 유다의 전성기였고 요단강 동쪽 사마리아 지방까지 차지합니다. 그의 사망 후 왕권은 아내에게, 제사장 권은 아들 아리스토 불루스에게 맡겨집니다. 그는 어머니와 형제 셋을 감옥에서 굶어 죽게 하였습니다. 그중 한 명이 살아서 미망인 살로메 알렉산드라 여왕과 결혼합니다. 그가 제3대 왕 알렉산더 요나우스 왕입니다. 제4대 알렉산드라 여왕이 일 년간 통치합니다. 아들 히루카누스는 정치를 하고 다른 아들은 아리스토불루스는 제사장을 맡았습니다. 이때부터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었습니다. 그 후 헤롯대왕이 간접통치를 합니다.   

     

    3. 헤롯의 통치: 로마시대

    로마제국은 우리나라의 1.4배, 그리스보다는 5.3배정도 컸습니다. 그리스는 3면이 바다로 되어 있어 교통과 왕래가 별로 없는 곳이었습니다. 반면에 로마는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서로 왕래할 수가 있었고, 지중해성 기후로 산물이 많이 나왔습니다. 로마는 동, 서 문화가 섞이지 않아서 순수한 유럽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육백 년 정도  걸려서 로마의 모습을 갖췄습니다. 로마의 역사는 우리에게 쉽게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로마도 망하였습니다. 이처럼 권력이나 돈은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습니다. 링케는 "고대문명은 전부 로마라고 하는 호수 속에 흘러 들어갔고, 로마에서 다시 근대문명이 흘러나온다'고 하였습니다. 로마가 강성해진 이유는 시민들에게 참정권을 주어 정치에 참여시켰다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국민이 노예와 같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헤롯가문은 정치적으로 유다를 다스렸으므로 영향력이 컸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들과 같은 사람들이 많으므로 정의롭게 대처해야 합니다. 로마는 점령지를 총독이 다스리게 하거나 그 지방의 분봉왕이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에 반항하였습니다. 안티파테르는 이두매의 통치자로서 이스라엘의 총독이 되었습니다. 그는 로마사람들보다 유대인을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헤롯대왕은 다섯 아들 중 둘째였습니다. 헤롯대왕의 둘째 아들인 아르켈라우스 안티바스는 세례요한의 목을 벤 자입니다. 빌립 1세는 아르켈라우스의 이복동생이었고, 그의 아들 빌립 2세는 살로메와 결혼하였습니다. 아그립바 1세는 헤롯대왕의 손자로 유다와 사마리아를 지배하면서 요한의 형 야곱을 사형시키고 베드로를 투옥시켰습니다. 헤롯가 여인으로는 헤로디아, 살로메, 베니스, 드루실라가 있습니다. 헤롯대왕은 25세 때 아버지로부터 갈릴리지방의 총독자리를 물려받았습니다. 이집트, 시리아 등 강대국들은 무력해지는 시기였고 유대의 하스몬 왕가도 부패한 상태였습니다. 로마의 힘도 완전히 강화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힘의 공백상황이었습니다. 왕권의 유지를 위하여 아들 셋을 죽일 정도로 집요한 사람이었던 그는 결국 우울증에 걸리게 됩니다. 그때 동방박사 세 사람이 나타나 예수의 탄생지에 대하여 묻습니다.      

     

     

    결론적으로, 마카베오 가문은 저항 정신, 회복력, 종교적, 문화적 자율성 추구의 정신을 구현한 이스라엘 역사상 우뚝 솟은 인물입니다. 구약성서에 뿌리를 둔 마카비 반란은 영감의 횃불 역할을 하며, 자신의 유산을 보호하겠다는 결심을 한 민족의 지속적인 힘을 상기시켜 줍니다. 마카베오 가문의 유산을 되돌아보면 그들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역사의 구조 속에 엮여 있으며, 이는 국가의 서사를 계속해서 형성하고 있는 불굴의 정신에 대한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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